파주, 겨울 들판의 경외감, 셔터 소리가 멈추는 경건한 순간들/Paju, the Awe of Winter Fields, the Reverent Moments When the Shutter Falls Silent
파주, 겨울 들판의 경외감, 셔터 소리가 멈추는 경건한 순간들
겨울이 깊어지면 대지는 무채색으로 변하지만 하늘과 들판은 오히려 생명력으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철새들이 우리 곁으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들은 멀리 오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근처 논밭과 공원, 그리고 집 앞 나뭇가지에까지 내려앉아 겨울을 함께 보낸다.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마주하는 일은 단순한 촬영을 넘어 자연이 건네는 질서와 생존의 의지를 관찰하는 경건한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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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쉼터 |
Paju, the Awe of Winter Fields, the Reverent Moments When the Shutter Falls Silent
As winter deepens, the earth turns into shades of monochrome, yet the sky and fields begin to bustle with vitality. This is because migratory birds, having flown thousands of kilometers, come to be with us. They do not remain only in remote wildernesses, but alight in the rice paddies and parks near our daily lives, and even on the branches just outside our homes, sharing the winter with us. To face them with a camera is more than a simple act of photographing—it is a reverent journey of observing the order and will to survive that nature best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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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날다 |
-쇠기러기가 그리는 하늘의 문양과 질서
겨울 들판에서 가장 먼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쇠기러기 무리다. 수백, 수천 마리가 집단을 이루어 이동하는 이들의 모습은 장관을 넘어선 경외감을 준다. 쇠기러기들은 철저하게 V자 대형을 유지하며 비행하는데 이는 선두가 만들어낸 공기 저항의 소용돌이를 이용해 뒤따르는 동료들이 에너지를 아끼게 하려는 생존의 지혜다. 비행 중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그들의 울음소리는 단순히 소음이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속도를 조절하라는 대화다.
논둑에 내려앉아 낙곡을 줍는 그들의 모습은 정교한 군대와 같다. 무리가 먹이 활동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몇몇은 반드시 고개를 높이 들고 주변을 경계한다. 인간이 사는 논밭 근처까지 다가온 그들이지만 야생의 본능은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쇠기러기의 날갯짓 소리는 무겁고 둔탁하지만 그 소리가 모여 하늘을 뒤덮을 때 들판은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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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두루미-날다 |
-재두루미를 대하는 사진가의 예우
쇠기러기의 소란스러운 활기가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고요의 정점에는 재두루미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귀한 손님은 자태부터가 남다르다. 우아한 목선과 회색빛 깃털, 그리고 눈가에 선명한 붉은 반점은 그들이 왜 예부터 영물로 대접받았는지 증명한다. 재두루미는 극도로 예민하여 작은 움직임이나 소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그들을 담을 때는 셔터 소리조차 성당의 기도 시간처럼 조심스러워야 한다.
재두루미는 주로 가족 단위로 움직이며 논바닥에서 조심스럽게 먹이를 찾는다. 그들이 고개를 들고 뷰파인더 너머의 나를 응시할 때 사진가는 숨을 멈춘다. 그것은 피사체를 쫓는 자의 긴장이 아니라 자연의 주인 앞에 선 이방인의 예절이다.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삿대질을 해서는 안 되는 귀한 조류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들의 날갯짓은 공기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우아하게 밀어내는 것에 가깝다. 재두루미가 하늘로 비상할 때 느껴지는 그 장엄함은 인간이 만든 어떤 건축물이나 영상보다 역동적이고 기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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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새-식사 |
-작고 부지런한 이웃들, 되새와 박새의 겨울나기
웅장한 대형 조류에 취해 있다가 발밑과 나뭇가지 끝으로 시선을 옮기면 작고 소중한 이웃들이 보인다. 되새 무리는 눈발 섞인 바람이 부는 논둑 낙엽 사이를 부지런히 뒤진다. 이들은 워낙 작고 빨라서 언뜻 보면 낙엽이 굴러가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아주 세밀하게 씨앗을 골라내는 생존의 작업을 수행 중이다. 되새 한 마리가 차지하는 공간은 작지만 그들이 모여 이루는 군집의 힘은 겨울의 적막을 이겨내는 든든한 에너지다.
공원이나 집 근처 나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박새는 우리와 가장 친근한 겨울 친구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서도 떨어지지 않는 날렵한 곡예를 보여주며 숨겨진 벌레 알이나 열매를 찾아낸다. 박새의 작고 검은 눈망울에는 겨울의 매서움보다 하루를 버텨내는 생명의 단단함이 서려 있다. 큰 새들이 주는 경외감과는 또 다른 애틋함과 친근함이 박새의 움직임에 담겨 있다. 우리 삶의 터전인 공원과 나무가 그들에게는 소중한 식당이자 안식처가 된다는 사실은 새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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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날다 |
-공존의 공간, 빈 하늘이 주는 즐거움
철새들이 머물다 간 자리는 공허하지 않다. 그들이 남긴 비상의 궤적과 부지런한 생존의 흔적은 겨울 들판을 풍요롭게 채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새들의 움직임과 행태를 관찰하다 보면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보다 역동적으로 날아오르는 생명체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이는 이유는 그 안에 멈추지 않는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겨울 들판은 새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새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거대한 공유지다. 사진가는 그저 그들의 평화를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멀리 떨어져 기록할 뿐이다. 셔터 소리가 멈추고 새들이 평온하게 먹이 활동을 이어갈 때 비로소 진정한 만남은 성사된다. 이제 겨울 날씨는 예전만큼 춥지 않고 삼한사미의 먼지가 시야를 가리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들은 여전히 제 갈 길을 가고 제 삶을 산다. 우리 근처 논밭과 나무까지 찾아온 이 귀한 이웃들을 지켜보며 남은 겨울의 마디를 경건하게 담아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