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에서 명동까지, 뜨겁고도 설레는 서울의 연말/The Backlight of the West Sea, an Outing of Things Fading Away

 서해에서 명동까지, 뜨겁고도 설레는 서울의 연말


-서해의 역광, 저물어가는 것들의 나들이

역광으로 다가온 서해는 세상의 모든 형체를 단순한 실루엣으로 바꾸어 놓는다. 찬연한 금빛으로 부서지는 파도 너머로 열심히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보이고, 그 너머로 시선을 올리면 천공은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맑은 얼굴로 서 있다. 물이 가득 차오르기 전, 광활하게 펼쳐진 갯벌의 주인인 양 고개를 숙이던 소심한 왜가리조차 연말의 들뜬 기운을 눈치챈 것일까. 녀석도 오늘만큼은 연말 나들이라도 나온 듯 평소보다 대범하고 잔잔한 움직임으로 자리를 지키며 서해의 겨울을 만끽한다.

하늘은 새보다 큰 덩치를 가진 비행기들이 끊임없이 포효하며 날아오르는 연말의 분주함을 그대로 투영한다. 비행기는 누군가의 새로운 시작이나 그리운 재회를 향한 여행을 싣고 떠나고, 그 아래로 이름 모를 새들은 저녁 빛의 파편 속을 군무하며 일몰의 깊은 심연 속으로 저물어간다. 산타의 출입구를 정비하듯 굴뚝 주변을 바쁘게 오가는 굴뚝새 한 마리는, 대체 무엇이 그리 바빠서 이 아름다운 일몰을 즐기지 못하느냐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한다. 빛의 방향에 따라 새들의 깃털 색깔이 다르게 투영되듯, 우리 인간들도 각자가 마주한 삶의 각도에 따라 저마다의 연말을 다른 색으로 그려내며 결국은 집이라는 근원적인 안식처를 향해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영종대교

The Backlight of the West Sea, an Outing of Things Fading Away


The West Sea, approached in backlight, turns every shape of the world into a simple silhouette. Beyond the waves breaking into brilliant golden shards, I see children hurrying home, and when I lift my gaze further, the sky stands with a clear face even in the biting winter cold. Before the tide rises, even the timid heron that once bowed its head as if it owned the vast mudflats seems to have sensed the festive spirit of year’s end. Today, it lingers with movements more composed and bold than usual, savoring the winter of the West Sea as if on a holiday outing.

The sky mirrors the bustle of year’s end as airplanes, larger than birds, roar endlessly upward. Each plane carries journeys toward someone’s new beginning or a longed-for reunion, while beneath them nameless birds dance in formation through fragments of evening light, sinking into the deep abyss of sunset. Like Santa preparing his entrance, a chimney swift busily flits around the chimneys, fixing me with a look that seems to ask what could possibly be so urgent that one cannot pause to enjoy this beautiful sunset. Just as the color of feathers shifts with the angle of light, so too do we humans paint our year’s end in different hues depending on the angles of our lives, ultimately concluding the long journey by returning to the fundamental refuge called home.


하늘-풍경


-푸른 천공의 항로, 마무리를 향한 환송

시선을 돌려 마주한 또 다른 하늘은 일몰의 붉은 기운 대신 서늘하고 깊은 청색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푸른 천공은 겨울 공기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담아낸다.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마치 한 해의 마지막 장을 넘기듯 정교하고 단호하게 자신의 항로를 그려 나간다. 시내의 야경과 풍경은 작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지만, 저 하늘 위를 흐르는 기류에는 다가올 뱀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이 미묘하게 섞여 있다.

정작 무엇을 하며 이 소중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지 망설여지는 마음 또한 연말의 단상이다. 최근 며칠간 공항이라는 거대한 플랫폼에서 타인을 환송하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 해의 마지막 업무들을 정리했다. 그렇게 타인의 삶을 배웅하는 굵직한 매듭들을 간신히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시간이 시작된다. 비행기가 남기고 간 궤적이 푸른 하늘에 서서히 녹아들 듯, 지난 일 년의 고단했던 기억들도 저 높은 곳의 정적 속으로 흩어진다. 이제 소란스러웠던 환송의 시간을 뒤로하고, 나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도심의 밤으로 발길을 옮길 차례다.


서해-일몰


-  붉은 낙조를 닮은 도시의 열기

도심으로 들어서면 풍경은 완전히 다른 속도로 변모한다. 서해에서 마주했던 강렬한 붉은 낙조가 바다 너머로 사라진 줄 알았건만, 그 뜨거운 에너지는 명동의 한복판에서 인공의 불빛으로 다시 타오르고 있다. 태양을 가로지르던 새들의 군무는 이제 화려한 전구 아래 모여든 사람들의 물결로 치환된다. 머리 위로 길게 늘어진 조명들은 밤하늘에 수놓인 별처럼 반짝이고, 거리마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연말을 만끽하며 거대한 흐름을 형성한다. 수많은 타인의 기운이 물리적으로 스치고, 들뜬 마음들이 어깨를 부딪치는 이곳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실감한다.

화려한 전광판 아래 노점상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이 소음은 역설적으로 가장 평화로운 연말의 합창이 된다. K팝의 선율이 흐르고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방인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설렘을 표현하는 서울의 밤은, 조금 전 서해에서 보았던 정적인 침묵과는 대조적인 생명력을 뿜어낸다. 이 거대한 도심의 속도감에 몸을 맡긴 채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비로소 한 해를 보낸다는 실감이 차가운 바람을 타고 가슴 한구석을 채운다. 우리는 누군가의 기운을 빌려, 그리고 나의 기운을 나누어주며 이 추운 계절을 함께 건너고 있다.


명동-인파


-명동의 불야성, 연말 인파 속에서

인파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시선 끝에 마침내 명동성당의 거리에 닿는다. 

화려하고 현란한 상점들의 네온사인 사이로 우뚝 솟은 그 정갈한 벽돌조 건물은, 소란스러운 도심의 질서를 조용히 붙잡아 매는 닻과 같다. 성당 앞마당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간절한 소원을 가슴에 품고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는 첨탑을 바라본다. 굳이 거창한 성취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다가오는 내년에도 무사히 버틸 수 있기를, 사랑하는 이들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작고 소박한 기원들이 이 거룩한 공간에 웅성거리며 모여든다.

연말로 향하는 수많은 날 중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간다. 인파 속을 구경하고, 작은 물건들을 쇼핑하며 보낸 이 밤 나들이는 누군가에겐 흔한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지난 일 년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한 중대한 의식이다. 서해의 붉은 낙조와 푸른 하늘의 비행기, 그리고 명동의 활기와 성당의 고요가 교차하는 이 서사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보여주는 가장 진실한 얼굴이다. 오늘 렌즈에 담긴 풍경들은 이제 하나의 기록으로 남아, 작년에도 그랬듯 다가올 미래 앞에서도 우리가 변함없이 서로를 확인하며 살아갈 것임을 증명한다. 2025년의 서울, 그 뜨겁고도 서늘했던 저녁은 이렇게 나의 기록 속에 깊은 낙인처럼 새겨지며 한 페이지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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